투팍 샤커 살인 사건, 27년 만에 드러난 충격적인 진실!

투팍 샤커 살인 사건

1996년 9월 7일 밤 투팍은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를 보러가기 위해 슈그 나잇과 같이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MGM 호텔로 향했다. 경기 후 호텔 로비에서 투팍 일행은 크립스 갱단 멤버인 올랜도 앤더슨을 발견했다. 올랜도 앤더슨은 연초에 데스 로우가 투자한 신발 가게에서 물건을 훔친 전과가 있었다. 이에 그를 발견한 투팍이 먼저 그를 공격했고 뒤이어 일행 전체가 그를 집중구타했다. 이 상황은 당시 호텔 CCTV에 촬영되어 훗날 세계적으로 유명한 영상이 되었다.


당시 투팍과 슈그는 가석방 상태였기 때문에 총격 사건에 연루된 이상 투팍은 죽지 않았더라도 슈그처럼 중형 선고를 피할 순 없었을 것이다. 총격 사건에서 살아남은 슈그 나잇은 7년형을 선고받고 2002년에야 출소했다. 폭행 사건 이후 호텔을 나온 투팍 일행은 검은색 BMW 750iL를 타고 자신들의 클럽인 662로 향했다.


생전 투팍의 모습이 생생히 담긴 마지막 사진


1996년 9월 7일 밤 팬에 의해 촬영된 총격 직전의 모습의 사진.

오후 11시부터 11시 5분까지 그들은 자동차 내에서 볼륨을 너무 크게 틀었다는 이유로 라스베이거스 교통경찰에게 단속되었다가 풀려났다.

오후 11시 10분 맥심 호텔 앞에 위치한 코발 레인과 플라밍고 로드 사이 교차로에서 빨간 신호를 보고 차를 정지했는데 이때 여자 두 명이 탄 차량이 왼편에 정차한 채 슈그와 투팍에게 말을 건네 시선을 빼앗았다. 슈그는 운전하느라 보지 못했으며 투팍은 차량의 선루프 위로 몸을 일으켜서 여자들에게 클럽 662로 오라고 초대했다.

오후 11시 15분 여자들이 말을 걸어 시선이 쏠린 사이 우측으로 흰색 캐딜락이 조용히 다가와 차량의 창문을 열고 투팍이 타고 있던 BMW 750iL의 오른편에 정차해 이들을 향해 집중사격을 가했다. 발사된 11발 중 9발이 투팍에게 집중되어 겨눠졌고 한 발은 운전 중이던 슈그 나잇의 머리에 아슬아슬하게 비껴갔다. 투팍은 그 중 4발을 신체에 맞았으며 두 발은 가슴에, 한 발은 팔에, 그리고 나머지 한 발은 대퇴부에 명중되었다. 가슴에 맞은 두 발 중 한 발은 그의 오른쪽 폐에 꽂혀 치명적인 호흡곤란을 일으켰다.

총격 사건 이후 경찰은 슈그 나잇과 투팍을 인근 대학병원으로 이송했다. 그는 6일 동안 혼수상태에 빠져 호흡기에 의지하게 되었다. 데스 로우의 아티스트이자 투팍과 절친이었던 대니 보이는 당시 투팍이 있었던 병실에 끊임없이 계속되었던 살해 위협에 대해 증언했다.

1996년 9월 13일 오후 4시 3분 투팍은 결국 향년 25세로 숨지고 말았다. 투팍의 시신은 다음날 화장되었다.

두 달 뒤 그의 다섯 번째 앨범이자 유작 앨범인 The Don Killuminati: The 7 Day Theory가 사후 발매되었다.

2023년 7월 네바다주 라스베이거스 경찰국은 라스베이거스 외곽의 한 주택을 수색했다고 밝혔다. 네바다주에는 살인 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없다.




27년만의 검거

2023년 9월 30일, 미국 경찰이 투팍을 살해한 용의자를 27년만에 검거하였다. 라스베이거스 경찰에 의하면 피의자는 두에인 "키피 D" 데이비스(Duane "Keefe D" Davis)라는 갱단 두목이었다. 투팍과 마찬가지로 마이크 타이슨 경기를 조카인 올랜도 앤더슨과 같이 보러 갔는데 이 조카가 투팍 일행과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했고 격분한 키피 D는 자신의 갱단을 동원해 클럽으로 가던 투팍 일행에게 총격을 가했다고 한다. # 키피 D는 현장 지휘자로 직접 네 발의 총격을 가했다고 진술했다고. 27년 만의 검거이고 키피 D의 자백을 받아낸 걸로 보아 익명의 갱단 관계자가 경찰 측에 결정적인 제보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슈그 나잇이 계획했다?

범인이 발사한 총알 중 대다수가 투팍에게 겨눠져 있었고 슈그가 멀쩡했다는 이유와 사고 후 멘붕 상태의 행동으로 인해 투팍 사후 공범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그러나 후에 이하 내용들을 통해 이는 곧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 사후 다큐멘터리에서 투팍의 보디가드는 Before i wake에서 투팍 사고 후 슈그가 데스 로우 레코드 내에서 스태프들을 모아놓고 이 상황에 대해 분노하는 모습에 대해 소회한다.

2) "The killing of Tupac Shakur"의 저자 저널리스트 케이티 스캇도 슈그 공범설에 대해 부정하였다.

3) 1996년 당시 사건을 담당하고 조사했던 라스베가스 경찰 소속 브렌트 베커도 슈그의 공범 가능성은 없음을 확인하였다.

결론적으로 슈그는 투팍을 죽일 타당한 이유가 없다. 저작권료 때문에 투팍을 죽였다는 주장 역시 설득력이 떨어진다. 어차피 투팍의 사후 저작권료는 그의 어머니였던 아페니 샤커에게 돌아가게 되어 있었고 실제로 어머니가 전액 수령했다. 게다가 슈그는 가중 처벌을 받을 수 있는 가석방 상태에 있었으므로 살해에 동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당시 투팍은 데스로우와의 계약이 남은 상태였다. 즉, 본인에게 큰 돈을 벌어다 주었고 앞으로도 활약할 인기 아티스트를 어떤 명분도 없이 본인 목숨까지 걸어 가면서 해친다는 것부터 말이 안 되는 부분이다. 시기적으로도 투팍은 2장으로 이뤄진 전례 없는 볼륨의 All eyes on me 앨범을 내면서 음악적 성취는 물론이고 상업적으로도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고 있었으며 이는 단지 데스로우에서의 첫 앨범일 뿐이었다. 투팍은 이용가치가 떨어지거나 말을 안 듣는 골칫덩이가 아니라 창출해낼 금전적 가치가 앞으로도 얼마나 커질지 알 수 없는 보물 같은 존재였다. 그러므로 슈그 공범설은 신빙성이 매우 떨어지는 주장이다.

또 유력한 용의자였던 올랜더 앤더슨 역시 투팍이 사망한 지 2년 뒤 동네 주유소에서 강도들과 시비가 붙어 살해당하고 만다. 그는 슈그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 주는 대가로 거액의 합의금을 받아 대형 로펌의 변호사를 선임해 본인과 무관하다고 주장했고 살해 직전까지 고향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범행에 동조한 데스 로우의 사설 보안업체 사장 레지 화이트 주니어가 용의자로 지목되었다. 그는 부패 혐의로 쫓겨난 전 LA 경찰로 당시 지역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다.

거기에 데스 로우의 보안을 담당하던 업체의 사장이었으니 당연히 지저분한 돈에도 관련이 있었다. 심지어 크립스와도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더욱 의심을 받았으나 직접적으로 연루했다는 증거가 없어서 이 문제로 처벌을 받진 않았다.




그의 죽음에 조력했던 내부의 적 레지 라이트 주니어(Reggie Wright Jr.)

생전 2pac에게 가장 가까운 사이이자 그의 보디가드로 고용되어 있었던 프랭크 알렉산더(Frank alexander)는 2Pac이 가족처럼 대해 줬던 몇 안 되는 이였고 Pac이 죽기 전 그가 겪었던 당시 Death Row의 어수선한 분위기와 사망 당시 느꼈던 이상한 상황들로 인해 그의 총격 사건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다수의 Death Row 관련자들의 목격담으로 Pac의 죽음의 배후에 무언가가 있음을 느끼게 되었다. 프랭크는 Pac과 거의 매순간 동행하면서 Death Row내의 속사정을 아주 잘 알고 있는 주요 목격자 중 한 명이었고 Pac이 총격을 받을 당시 프랭크는 Outlawz 멤버들과 함께 그 현장에 있었다.

사건 현장의 주요 목격자였던 그는 2Pac 사망 사건의 배후에 누군가 조력자 역할을 한 것 같은 내부의 적이 있는 듯한 강한 인상을 받았으며 이에 근거해 자서전 "Got You Back"을 발간했고 이를 기반으로 한 "Before I Wake"이라는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다.

2002년 LA Times 사고 전문 리포터 Chuck Philips에 의해 "Who Killed Tupac Shakur?"라는 두 편짜리 방송이 방영되었고 이를 기점으로 2Pac의 사건이 재조명되었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유명한 리처드 본드(Richard Bond)가 프랭크의 증언과 더불어 사건 당시 주요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와 Death Row 내의 비리, LAPD와 갱들간의 유착 관계 등을 토대로 해서 2Pac의 죽음에 대한 구체적인 정황과 여러 증거들을 모은 숨겨진 진실이 담겨진 2pac: Assassination이 만들어지면서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스눕 독과의 불화

알다시피 스눕 독은 생전 투팍과 불화가 있었는데 그게 수면 위로 올라온 사건이 1996년 5월 4일에 방영된 Saturday Night Special 방송이었다.

이 방송 이후 투팍은 스눕 독과 그의 의도를 의심하게 되었다. 이 날 이후 둘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방송 PD가 말하길 스눕은 투팍과 함께 2 of Amerikaz Most Wanted을 열창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둘은 함께하지 않았다. 투팍은 리허설에 모습을 드러냈으나 스눕은 어디에도 없었다. 투팍은 이 날 방송에 나타나지 않은 스눕에게 엄청난 분노를 느꼈으며 스눕은 그동안 투팍에게만 포커스를 맞추던 데스 로우와 Suge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방송 이후 투팍과 스눕은 9월 3일에 있었던 MTV와의 인터뷰 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날 인터뷰도 투팍만이 주도할 뿐 스눕은 멍하니 있는 모습을 보인다. 스눕과 함께한 이 인터뷰에서 투팍은 East vs West와의 전쟁은 미디어가 만든 허상일뿐 비기와 나의 개인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사태를 무마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이 인터뷰를 할 때쯤 그는 서서히 마음을 열고 동부 레이블 래퍼들과의 합작품인 One Nation이라는 앨범을 제작하고 있었다. 둘의 불화는 Danny Boy 및 그의 보디가드였던 프랭크 알렉산더 등 다양한 당시 주변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외에도 유튜브에 Snoop 2Pac Beef라고 검색하면 많이 나온다.

하지만 2012년 스눕독과 함께 The Coachella Valley Music and Arts Festival에서 사후앨범 The 7 Day Theory 수록곡 "Hail Mary"와 4집의 "2 of Amerikaz Most Wanted"를 홀로그램으로 부활해 불렀다. 이에 대해서 갑론을박이 오고갔으나 공연에 대한 반응은 괜찮은 듯하다. 그리고 당연한 말이겠지만 투팍 사후 스눕 독은 그에 대한 앙금이 모두 사라졌다고 봐도 될 듯하다. 오히려 투팍 사후에 그를 추모하는 행사나 기념식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 그를 앞장서서 기리는 역할을 많이 할 정도. 2020년에는 새로운 뮤직비디오를 제작하는데 딥페이크로 투팍을 출연시키려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LA의 인디 제작사 Corridor Digital에 딥페이크 부분을 제작 의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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